당시 일본에 주재하던 미국 성서공회 루미스(Henry Loomis, 1839-1920)
총무는 유대인 청년 피터스가 세례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실을 알고 그를
만났다. 4월 21일 시베리아로 다시 돌아가려는 피터스에게 루미스 총무는
미국 성서공회가 파송하는 권서(勸書, colporteur)로서 피터스가 한국에
가서 일하기를 제안했다. 이 제안을 기쁘게 수락하였고, 피터스는 영어를
배우면서 그해 5 월 16일 부산과 제물포를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한국에
도착한 만 24세의 미혼 청년 피터스는 곧장 한국어를 배우면서 서울
근교에서 권서활동을 시작했다. 피터스가 한국에 도착한 1895년의 한국어
성경번역의 상황은 1887년 이후 소위 로스역 신약전서가 출판되어
있었으나, 아직 구약 성경번역은 나오지 않았다.
1885년 언더우드(H.G.Underwood)와 아펜젤러(H.G.Appenzeller) 선교
사를 선두로 개신교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내한하기 시작한 이래, 1893
년에 “상임성서실행위원회(The Permanent Executive Bible Committee=
The Bible Committee of Korea)”가 조직되었고, 같은 해 10월에
공인번역위원회(The Board of Official Translators)를 만들어 본격적인 성경
국역사업을 시작하였다. 이 공인번역위원회는 먼저 신약번역에 착수하여
기존의 로스역 신약전서를 대체할 신약전서를 1906년에 확정하여 출간했다.
피터스가 한국에 온 1895년에 구약국역은 이러한 상황에서 아직 멀게
만 느껴졌다. 피터스는 1895년 5월부터 1898년 6월까지 미국성서공회 일본
지부 루미스 총무의 관할 아래 한국에서 권서의 일을 열심히 했다. 권서로서
활동하면서 피터스는 당시 한국인들이 얼마나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읽기를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다. 아직 구약이 한국어로 번역된 적이 없으며 앞으로
구약성경이 공인번역위원회를 통해 나오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권서활동을 하면서 틈틈이 시편을 번역하여 한국인
들에게 구약의 말씀을 전해주고 싶었다. 그 결과 피터스가 시편 중에서
발췌하여 한국어로 번역한 시편촬요가 1898년 말에 출간되었다.
(성경 번역 이야기, 김중은)
샬롬
강용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