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성경(4):구약

한편 피터스는 시편촬요를 출간한 이후 성경(특히 구약) 번역자로서 선교사들의
격려와 주목을 받았다. 그는 1899년 대영 성서공회 서울 지부에서 일하던 자리를
사직하고, 1900년 1 월 미국 시카고에 있는 맥코믹 신학교(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을 공부하러 떠났다. 맥코믹 신학교에 3 년간 재학하는 동안
피터스는 1901년에 미국 장로회 해외 선교본부에 선교사로 지원하고 있었다. 피터스는
1902년 엘리자벳 캠벨(Elizabeth Campbell)과 결혼하고, 피터스 선교사 부부는 1904
년 5월 16일 한국으로 파송되었다. 피터스가 다시 한국에 오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루미스는 한국에서 구약 번역을 하는데 그가 적임자라고 판단해 미국성서공회 본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피터스야말로 구약 번역에 필요한 자질을 갖춘
유일한 사람이라는 의견이 중론입니다‥ 나는 그가 구약 번역을 완성하도록 허락
되기를 희망하며, 어떤 다른 사람이 수정하거나 통일하여 그 일이 방해받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피터스를 준비시켜 오신 듯 보입니다.“ (박용규, “알렉산더
피터스‥“ 상게서, 59-60쪽에서 재인용함). 피터스는 한국에 도착하여 미 북장로회
서울 남부지역 선교구를 맡아서 전도와 교회 개척, 사경회 인도 등에 전력했다. 이러한
가운데 1906년 1 월에 피터스는 첫 부인과 사별하게 된다. 그 해에 피터스는 공인
번역위원회에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동안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구약시대 초기부터, 특히 구약을 번역할 때
히브리어 원전을 읽는 실력이 무엇보다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족한 구약 번역 위원을 충원하기 위해 1906년 10월 3일부터 크램(Willard Gliden
Cram, 1875-1969, 奇義男)과 피터스가 공인 번역위원회의 번역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때부터 1907년 말까지 레이놀즈, 크램, 피터스 3 인이 구약 번역을 추진해 나갔다.
1907년 말에는 피터스가 초역한 전도서가 공인 번역위원회 역으로 확정되었으나
낱권으로는 출판되지 않았다. 피터스는 1908년 3 윌 미장로회 해외 선교부 파송으로
내한하여 의사로서 의료선교에 종사하던 에바 휠드(Eva H. Field, 1868-1932)와
재혼하였고 여기서 두 아들 르우벤(Reuben Field, 1908-)과 리처드(Richard Sawyer,
1910-)가 태어났다.

한편 레이놀즈는 이승두를 번역 위원으로 천거하여, 1908년 10월 31일부터 이승두도
번역위원이 되었다. 전주에서 레이놀즈는 서울에 있는 게일과 연락하면서, 전주에서
구약 번역(구역)의 완결을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10년 4월 2일
전주분과에서 서울에 있는 대영성서공회 지부 밀러(H. Miller)총무 앞으로 ” 번역 다
도엿소라”라는 전보가 도착했다. 이제 구약 전체의 국역작업이 일단 완료되었다는
것이다. 레이놀즈에 의하면, 공인번역위원회가 구약 국역을 끝내는 데는 1904년 10월
17일부터 1910년 4월 2일 까지 5년 5개월 16일이 걸린 셈이다. 이제 신약과 구약을
합하여 한국어로 번역된 최초의 성경전서가 1911년 3월 9일 구약 2권, 신약 1권으로
출간됨으로써, 그 역사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한글 구역
성경전서이다(구약 역사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글에 조회한다: 김중은,
“구약성서국역사“ , 구약의 말씀과 현실, 한국성서학연구소, 1996, 특히26쪽 이하).

“피터스야말로 구약번역에 필요한 자질을 갖춘 유일한 사람이라는 의견이
중론입니다…나는 그가 구약번역을 완성하도록 허락되기를 희망하며, 어떤 다른 사람이
수정하거나 통일하여 그 일이 방해 받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피터스를
준비시켜 오신 듯 보입니다. ”

샬롬
강용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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